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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조트 참사로 못 이룬 딸의 꿈, 아버지가 대신 이뤘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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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면

남태평양 섬나라 ‘바누아투’의 국립 혜륜 유치원·초등학교 재학생들과 고계석씨. [사진 고계석]

남태평양 섬나라 ‘바누아투’의 국립 혜륜 유치원·초등학교 재학생들과 고계석씨. [사진 고계석]

“딸 이름을 딴 초등학교가 남태평양 섬나라 바누아투에 있습니다. 이제 곧 중·고등학교도 문을 엽니다.”

울산에 거주하는 고계석(58)씨는 25일 중앙일보와 통화에서 “아이들이 상급학교로 진학해 공부를 계속할 수 있게 돼 다행”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고씨는 2014년 경북 경주에서 일어난 마우나 오션 리조트 붕괴 사고 때 딸 혜륜(당시 18)양을 잃었다. 그해 2월 17일 부산외국어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 진행되던 도중 리조트 지붕이 눈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지면서 일어난 사고였다. 이 참사로 10명이 숨지고 214명이 다쳤다.

부산외대 아랍어 학과 신입생이던 고씨의 딸 혜륜양도 희생됐다. 고씨는 딸 사망 보상금으로 나온 6억원 가운데 4억원을 바누아투에 학교를 지어달라며 기부했다. 바누아투 정부는 이 돈으로 ‘국립 혜륜 유치원·초등학교’를 세웠다. 바누아투는 인구 30만명인 기독교 국가다.

그곳에 교육기관을 세운 이유를 묻자 고씨는 유품을 정리하다 보게 된 딸의 일기장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혜륜이는 신앙이 깊은 기독교인이었다. 어린 시절 일기에 ‘세계를 돌고 선교 활동을 하며 어려운 이들을 돕고 싶다’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아랍어 학과에 진학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라며 “혜륜이는 일찍 떠났지만, 딸 이름을 딴 교육시설을 기독교 국가인 바누아투에 지으면 그 꿈이 어느 정도 이뤄질 것으로 생각했다”고 했다.

고씨는 “교회 활동을 통해 바누아투가 교육환경이 열악한 기독교 국가란 것을 알게 돼 기부하기로 결정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2016년 7월 문을 연 국립 혜륜 유치원은 바누아투에 들어선 첫 유치원이다. 혜륜양 이름을 따 지은 이 유치원에 2019년 3월 서울대 빗물연구센터가 빗물 식수화 시설을 설비했다. 그해 7월엔 고씨 직장인 현대중공업이 유치원에 학용품을 지원하는 등 도움의 손길이 이어졌다. 곧 개학할 바누아투 중·고등학교 또한 ‘선한 영향력’ 메아리 효과로 탄생했다. 혜륜 유치원·초등학교를 졸업한 아이들이 마땅히 진학할 상급 교육시설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고씨 지인 기부로 지어졌다.

고씨는 보상금 가운데 바누아투에 교육시설을 짓고 남은 2억원은 혜륜양 모교인 부산외대에 기부했다. 부산외대는 이 돈으로 ‘소망장학금’을 만들어 한 학기당 학생 5~10명에게 총 100만~200만원을 지급해왔다. 유학이나 해외 활동 등을 바라는 부산외대 재학생이 지급 대상이며, 현재까지 89명이 받았다. 소망장학금이라는 명칭에도 이루지 못한 딸 소망이 이어지길 바라는 고씨 마음이 담겼다.

딸 사망 보상금을 모두 기부한 데 대해 고씨는 “평생 열심히 직장생활을 했지만 6억원이라는 큰돈을 실제로 만진 건 처음이었다”며 “하지만 결코 바란 적 없는 돈이다. 그 돈을 내가 쓴다면 나중에 혜륜이를 다시 만났을 때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을 것 같았다”고 했다. 이어 “기부 활동을 통해 2014년 마우나 오션 리조트 참사를 알게 되고, 희생자를 추모해주는 분도 많아지는 것 같다. 살아 있었다면 혜륜이 동생뻘인 학생들로부터 감사와 안부의 말을 듣는 게 삶의 큰 보람이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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