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렬 부산외대 외교전공 교수
굶주림 겪다 12세 때 가족과 탈북
중국서 발각 3개월간 수용소 생활
재탈북 후 한국 정착해 대학 진학
미국서 박사학위 받고 강단에 서
“제 삶 동기, 학생들에게 전하고파”
부산외대 김성렬(38) 외교전공 교수는 “힘든 순간 순간에도 노력과 함께 정확한 목표와 비전을 가진다면 어느새 본인이 그리던 목표에 다가가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재찬 기자 chan@
부산의 대학에서 전국 처음으로 탈북자 출신 정교수가 탄생했다. 2차례 탈북과 그 과정에서 북한 수용소 생활까지 거친 부산외대 김성렬(38) 외교전공 교수가 그 주인공이다. 김 교수는 2학기부터 국제정치이론, 남북관계론, 미국외교정책론 수업으로 학생들을 만나고 있다. 김 교수는 “포기하지 않고 노력한 나의 삶의 모습에서 많은 학생들이 자극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김 교수는 1985년 북한에서도 북쪽 지역인 청진에서 태어났다. 북한 생활은 배고픔과 노동의 반복이었다. 하루 세 끼 챙겨 먹기가 힘들었고 굶주림을 이겨낼 방법이 없었다. 풀과 국수를 섞은 풀국수 죽으로 하루 하루를 연명했다. 아버지와 이혼한 어머니는 TV를 팔아 밀가루 장사를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외화벌이 업체들이 장마당(시장)에 등장하면서 경쟁이 심해졌고 가세는 점점 기울었다. 김 교수가 12살 되던 해 어머니는 자식들을 모아 놓고 ‘중국으로 가자’고 했다. 그렇게 두만강을 건너 처음으로 탈북했다.
김 교수는 “3월이었는데 두만강에는 얼음이 떠다녔고 얼음장이 깨져 목에 물이 차던 일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말했다.
탈북 후 정착지는 중국 공장이었다. 중국에 정착한 지 3년째 되던 해 중국 공안이 공장으로 김 교수를 찾아왔다. 주변의 신고로 탈북자인 사실이 발각된 것이다. 어머니, 누나와 함께 다시 북송됐다.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석방되기까지 3개월간 김 교수는 수용소 생활을 했다. 수용소를 나온 뒤 다시 청진으로 향했다. 삶은 더욱 피폐했다. 2개월만에 다시 한번 탈북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
2차례 탈북과 수용소 생활. 힘겨웠던 10대 시절을 뒤로하고 20살이되던 2005년 김 교수는 한국 땅을 밟았다. 김 교수는 “중국에서의 삶 대신 한국에서의 삶을 선택한 건 공부를 해서 배워야겠다는 간절한 마음 때문이었다”며 “북한에서 느낀 건 계층에 따라 교육 격차가 있고 교육 격차가 신분 격차로 고착화 되는 구조였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북한 초등학교 과정인 인민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한글부터 다시 배워야했다. 북한 청소년을 위한 대안학교에서 초·중·고 검정고시를 1년여만에 통과했다. 김 교수는 “검정고시를 어렵게 통과하고 대학에 진학했는데 영어 원서를 도저히 볼 능력은 안됐다”며 “그때마다 북한 삶을 생각하며 공부의 한을 풀어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고 말했다.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며 경북 포항에 있는 한동대를 7년만에 졸업했다. 20살 한국 땅을 밟는 과정에서 관심이 생겼던 국제 정치, 외교 문제에 대한 관심은 공부를 할수록 더욱 커졌다. 그는 생계 전선으로 나가는 대신 “공부를 더 해서 박사가 되자”고 결심했다. 연세대 대학원을 거쳐 미국 시라큐스대 맥스웰스쿨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시라큐스대 맥스웰스쿨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졸업한 정치학 명문 학교다. 김 교수는 “미국에서 논문을 쓰기 위해 도서관에서 1년 6개월을 밤낮으로 씨름했다”며 “박사 논문 심사를 기다리는 시간이 인생에서 가장 피말리는 시간이었다”고 회상했다.
김 교수는 자신의 삶이 학생들에게 줄 수 있는 메시지는 노력과 비전이라고 말한다. 김 교수는 “한 달간 학교에서 강의를 하면서 학생들의 열정에 많이 배우기도 한다”며 “열정에 더해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한다면 북한에서 교육 기회조차 없었던 내가 교수가 된 것처럼 학생들도 성공할 수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힘든 순간 순간에도 노력과 함께 정확한 목표와 비전을 가진다면 어느덧 본인이 그리던 목표에 다가가 있을 것이다”고 강조했다.
출처 : 부산일보(https://www.busan.com/view/busan/view.php?code=2023100318221045387)